[이봉수의 우리말 찾기] 게끼와 딩기, 껍데기의 쓸모

이봉수

요즘 아이들은 '게끼'나 '딩기'라는 말을 아는 사람이 거의 없다. 사전에도 잘 나오지 않는 시골말이지만, 그 속에는 우리 조상들의 삶과 지혜가 오롯이 담겨 있다. 우리말은 단순한 말이 아니라 그 시대를 살아낸 사람들의 기억이기도 하다.

 

보리 타작을 해 본 사람이라면 '게끼'가 무엇인지 금방 안다. 게끼는 경남지방의 방언으로 곡식의 수염 부스러기나 겨를 말한다. 특히 보리에서 나오는 까끌까끌한 보릿겨를 게끼라고 했다. 손으로 만지면 따끔따끔할 정도로 거칠어 아이들은 함부로 만지지 못했다.

 

한편 정미소에서 쌀을 찧거나 보리를 빻고 나서 나오는 겨는 '딩기'라고 불렀다. 나락 딩기와 보리 딩기가 있었는데, 그 쓰임새도 서로 달랐다. 보리 딩기는 곱고 부드러워 개떡을 해 먹었다. 지금처럼 먹을 것이 넘쳐나는 시대에는 상상하기 어렵지만, 배고팠던 시절에는 버릴 것이 하나도 없었다. 알곡은 물론이고 겨마저도 사람의 허기를 달래는 소중한 먹거리였다.

 

딩기는 먹는 것에서 끝나지 않았다. 소죽을 끓일 때 보리 딩기를 한 바가지 넣어주면 소가 무척 좋아했다. 소는 단순한 가축이 아니라 한 집안의 가장 귀한 재산이었다. 논밭을 갈고, 짐을 나르고, 가족의 생계를 책임지는 고마운 존재였다. 그런 소를 위해 사람들은 딩기를 아낌없이 내어주었다.

 

비교적 거친 나락 딩기도 쓸모가 많았다. 묵혀 두었다가 거름으로 쓰기도 하고, 여름밤 모깃불을 피울 때 사용하기도 했다. 불씨를 살짝 묻어두면 밤새 연기가 모락모락 피어올라 모기를 쫓아주었다. 서울 사람들은 이를 '왕겨'라고 부른다. 이름은 달라도 그 쓰임새는 다르지 않았다.

 

가장 까칠한 게끼는 뜻밖의 곳에서 큰 역할을 했다. 논두렁콩을 심고 나면 개구리들이 갓 나온 콩싹을 잘도 따먹었다. 먹을 것이 귀했던 시절, 논두렁 한 뼘의 땅도 허투루 놀릴 수 없어 모를 심고 나서 논두렁마다 콩을 심었다. 그러나 사람만 콩을 좋아한 것은 아니었다.

 

그래서 어른들은 콩을 심은 자리에 게끼를 한 줌씩 덮어 두었다. 개구리들이 게끼의 까칠한 가시 때문에 쉽게 접근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자연을 거스르기보다 서로의 몫을 인정하며 살아가는 지혜였다.

 

어릴 적 논두렁콩을 심던 기억이 아직도 아련하다. 내가 지게작대기로 물렁한 논두렁에 구멍을 뚫고 나아가면 동생은 그 뒤를 따라오며 콩알 세 개를 넣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게끼를 살포시 덮었다. 어른들은 말씀하셨다. "콩 하나는 비둘기가 먹고, 하나는 개구리가 먹고, 하나만 살아남아도 사람이 먹을 수 있다."

 

그 말씀을 듣고 자란 우리는 먹을 것을 두고도 욕심을 부리지 않는 법을 배웠다. 인간만을 위한 세상이 아니라는 것을 논두렁콩 몇 알이 가르쳐 준 것이다. 짜투리땅에 심은 콩 한 알에도 사람과 새와 개구리가 함께 살아가는 철학이 담겨 있었다.

 

생각해 보면 게끼와 딩기는 모두 알곡의 껍데기다. 사람들은 흔히 알곡만 귀하게 여기고 껍데기는 버릴 것이라 생각한다. 그러나 게끼는 콩싹을 지켰고, 딩기는 사람과 소를 먹였으며, 논과 밭을 살찌우고 모기를 쫓아주었다. 세상에 쓸모없는 것은 하나도 없었던 셈이다.

 

인간 세상도 다르지 않다. 많이 배우고 돈과 권력과 명예를 가진 사람이 있는가 하면, 팍팍한 삶을 견디며 묵묵히 살아가는 사람도 있다. 눈에 띄는 알곡 같은 사람이 있는가 하면, 자신을 드러내지 않고 다른 이를 위해 살아가는 게끼와 딩기 같은 사람도 있다. 그러나 어느 하나 없어서는 안 될 소중한 존재들이다.

 

문득 별명이 '딩기'였던 옛 친구가 생각난다. 왜 그런 별명이 붙었는지는 이제 가물가물하지만, 어쩌면 그는 사람들 곁에서 묵묵히 자신의 몫을 다하는 사람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세상은 알곡만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게끼와 딩기가 있어야 비로소 한 톨의 곡식이 완성되듯이, 우리 모두가 서로를 존중하며 살아갈 때 비로소 사람 사는 세상이 되는 것은 아닐까.
 

 

[이봉수 논설주간] 

시인

이순신전략연구소 소장

https://myisoonsinxsz.zaemit.com/

 

작성 2026.07.25 12:09 수정 2026.07.25 1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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