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용대 칼럼] 길 위에 떨어져 있던 다정함

문용대

안보윤 소설가의 <그들이 두고 간 것>이라는 글을 읽다가, 나도 모르게 입가에 잔잔한 미소가 번졌다. 버스에서 툭 떨어진 아기의 분홍색 새 신발 한 짝을 주워 주인에게 찾아주기까지, 글쓴이가 마음속으로 겪었을 번거로움과 갈등이 고스란히 전해졌기 때문이다. ‘그냥 바닥에 내려둘 걸 그랬나’ 하는 순간의 후회를 넘어, 마침내 깨끗한 신발 두 짝을 나란히 신고 있는 아이의 사진을 받았을 때 찾아온 그 벅찬 뿌듯함. 적어도 손바닥 하나만큼은 이전보다 더 좋은 사람이 된 것 같다는 그 고백을 읽으며, 내 가슴 한구석에 묵혀두었던 오래전 기억 하나가 기분 좋게 되살아난다.

 

아주 오래전, 시골 고향 동사무소 앞에 차를 잠시 세웠다가 집으로 돌아왔을 때의 일이다. 동사무소에서 집까지는 약 20킬로미터, 자동차로 꼬박 30분을 달려야 하는 제법 먼 거리였다. 집에 도착해 차를 세우고 무심코 뒤편을 둘러보던 나는 그만 자리에 얼어붙고 말았다. 차량 트렁크 위에 두둑한 빨간색 여자용 비닐 지갑 하나가 덩그러니 얹혀 있는 게 아닌가. 

 

참으로 기적 같은 일이었다. 굴곡진 시골길을 아무 생각 없이 내달렸음에도 불구하고, 그 지갑은 비닐 특유의 접착력 덕분에 마법처럼 떨어지지 않고 용케 매달려 있었다. 조심스레 지갑을 열어보니 신분증과 여러 개의 신용카드, 그리고 한눈에 봐도 적지 않은 액수의 현금이 들어 있었다. 순간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이 지갑을 어디선가 잃어버리고 사색이 되어 있을 주인의 얼굴이 눈앞에 선했기 때문이다. 온 동네를 샅샅이 뒤지며 애태우고 있을 장면이 고스란히 전해져 내 마음마저 급해졌다. 

 

다행히 지갑 속 미니 수첩에서 연락처를 찾을 수 있었다. 서둘러 전화를 걸어 지갑의 행방을 알렸고, 얼마 지나지 않아 한걸음에 달려온 지갑 주인과 마주했다. 커다란 음료수 상자를 무겁게 들고 와 몇 번이고 고개를 숙이며 고마워하던 그 눈물겨운 얼굴은, 긴 세월이 흐른 지금도 내 기억 속에 생생히 남아 있다. 지갑이 거친 시골길 위로 떨어지지 않고 내 차에 매달려 준 것도, 주인에게 무사히 돌려줄 수 있었던 것도 모두 감사한 일이었다. 그날 하루 종일 가슴을 채웠던 따스한 온기는, 안보윤 소설가가 느꼈던 ‘손바닥만 한 좋은 사람’이 된 것 같은 기분과 정확히 닮아 있었다. 

 

인연이란, 혹은 선의란 이렇듯 우연히 찾아온다. 안보윤 소설가의 말대로 길 위에 사람들이 두고 간 것은 단순한 물건이 아닐지도 모른다. 그것은 삭막한 세상 속에서 우리가 타인에게 상냥해질 수 있는 기회이며, 내 안의 선함을 증명해 보일 수 있는 크고 작은 시험대이기도 하다. 

 

그 기억의 여운이 가시기도 전, 나는 며칠 전부터 마주하고 있는 또 하나의 ‘기회’를 떠올린다. 아파트 지하 주차장 한편에 하얀색 티셔츠 한 장이 툭 떨어져 있다. 누군가 빨래통을 옮기다 떨어뜨렸거나, 차 문을 열다 흘린 모양이다. 나는 주인이 쉽게 찾아갈 수 있도록 눈에 잘 띄는 곳에 옷을 걸어두고 주인을 찾아주기 위해 이리저리 마음을 쓰고 있지만, 아직 옷의 주인은 나타나지 않았다. 대수롭지 않은 물건으로 여기고 찾기를 포기했는지도 모르겠다.

 

오래전 내 차 트렁크 위에 기적처럼 매달려 있던 빨간 비닐 지갑처럼, 이 흰 티셔츠 역시 나에게 찾아온 하나의 작은 기회일 것이다. 내 시간과 체력을 조금 나누어 타인에게 다정해질 수 있는 기회. 지하 주차장에서 주인을 기다리고 있지만, 이 옷 역시 빨간 지갑이 그러했듯, 분홍색 아기 신발이 그러했듯, 따뜻한 주인의 품으로 돌아가 나에게 또 한 번의 뿌듯함을 선물해 주리라 믿는다. 

 

 

[문용대]

한국수필 수필문학상 수상

문학고을 소설문학상 수상

지필문학 창립10주년기념 수필부문 대상 수상

코스미안뉴스, 브레이크뉴스 고정 필진

한국예인문학, 지필문학, 대한문학, 각종 문학카페 활동

대한문학 부회장, 지필문학 이사

수필집 ‘날개 작은 새도 높이 날 수 있다’, ‘영원을 향한 선택’

이메일 : myd1800@hanmail.net

 

작성 2026.06.18 10:01 수정 2026.06.18 10: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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