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진서 칼럼] 한(恨)의 기억과 피해의식의 분기

영화 《왕과 사는 남자》

영화 《왕과 사는 남자》가 1600만 관객을 넘어섰다. 침체된 한국 영화계에선 반가운 소식이지만, 이 쏠림이 어디서 오는지에 대해서는 별도의 질문이 필요하다.

 

억울하게 죽은 왕 단종이라는 소재, 엄흥도라는 무명의 충절, 그리고 이 어린 왕과 밥상을 나누는 산골마을의 백성들. 이 조합이 왜 유독 2026년 한국의 관객을 붙잡았을까. 이 평범한(?) 영화가 우리 안의 어떤 감정 구조를 호출한 것인가.

 

한(恨)은 흔히 원한(怨恨)과 혼동되지만 원한과 한은 동일하지 않다. 한의 원형은 억압받은 자가 부당한 현실을 바꿀 수 없을 때, 그것을 내면에서 삭이면서도 끝내 놓지 않는 감각에 가깝다. 그리고 이러한 감각은 단독으로 머물기보다 함께 울고, 함께 버티고, 함께 기억하면서 비로소 공동체의 정서가 된다. 그런 의미에서 한은 원래부터 관계의 감정이다.

 

영화 속 밥상 장면은 이 원형을 정확히 드러낸다. 왕과 백성이 한 상에 앉는다는 것은 조선의 질서에서는 불가능한 일이다. 그런데 그것이 가능해진 배경에는 더 이상 왕이 아닌 단종의 억울함이 백성들과 공유되었다는 사실이 자리하고 있다. 수직적인 권력이 서로의 고통에 대한 공감을 통해 일시적으로 수평적인 공동체를 만들어낸 것이다.

 

엄흥도라는 인물로 대변되는 '단종의 백성'들은 목숨을 걸고 단종의 시신을 수습하고, 또한 목숨 걸고 그 사실을 함구한다. 짧은 시간, 어린 왕과 백성 사이에는 도대체 어떤 일이 있었던 걸까. 그리고 그들의 정서와 연동된 21세기의 한국인들은 왜 그토록 이 영화에 빠져드는 것일까.

 

영화 속 엄흥도는 신분의 한계를 뛰어넘어 스스로 관계를 선택한 사람이다. 위험을 감수하면서도 끝까지 자신의 선택을 실행에 옮긴 사람이다. 반면 단종은 억울하게 밀려난 존재이며 구조 속에서 희생된 존재이다. 관객들은 이 두사람 사이를 오고가면서 그들과 함께 울고 웃는다. 그러나 이 두사람은 같은 화면 안에서, 다른 감정의 방향을 가리킨다. 

 

1600만의 공감이 향한 곳이 어디였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그러나 나는 단종에 대한 과몰입이 지금 자신의 억울함을 대리 해소하는 감정으로 향하는 것을 경계한다. 그것은 단순히 영화 속 감상을 넘어, 우리 사회 피해의식의 집단적 재현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오늘날 한국 사회에서 피해의식은 하나의 집단적 문법이 되었다. 정치는 피해를 호명하면서 정당성을 만들고, 이 틈바구니에서 세대와 젠더는 얼키고설켜 서로를 가해자로 지목한다. 이 과정에서 한의 구조는 더욱 미묘하게 변형된다. 억압받은 자의 감정은 '억압받았다'는 정체성으로 굳어지고, 공유의식은 피해 집단의 결속으로 바뀌었다. 이 끈질긴 감각은 지금 한국 사회가 몸살을 앓고 있는 원한의 정치로 향하면서 국민 다수를 분열시키고 있다.

 

문제는 이 구조가 나르시시즘과 연결될 가능성이다. 나르시시스트는 상처를 중심으로 세계를 재구성한다. 이 때, 타자는 이해의 대상이 아니라 자신의 상처를 확인하거나 위협하는 존재가 된다. 이 회로가 집단에서 작동하기 시작하면 비판은 공격으로, 차이는 가해로, 피해의식은 면죄부로 변질된다. 한(恨)이 원한(怨恨)으로 미끄러지는 것은 바로 이 지점에서다. 한의 정서가 원한으로 탈바꿈되는 순간, 공동체는 사라지고 각자의 억울함만이 광장을 채운다.

 

우리는 지금, 누구와 동일시하는가? 엄흥도인가, 단종인가? 이 질문은 영화 바깥에서도 유효하다. 엄흥도는 자신의 억울함 때문이 아니라, 억울한 자 곁에 머물렀기 때문에 역사가 기억하는 이름이 되었다. 그는 피해자의 언어가 아니라 선택하는 자의 언어로 살았다.

 

반면 오늘의 광장은 저마다 자신이 단종이라고 주장하는 목소리들로 가득하다. 억울함의 크기를 경쟁하고, 피해의 정당성을 다툰다. 그 안에서 '엄흥도'는 많지 않다. 지금, 한국 사회에 필요한 것은 더 많은 피해의 언어가 아니다. 각자의 억울함을 삭이면서도, 스스로 '다른' 억울함의 곁을 선택하는 감각, 그것이 우리의 오래된 한(恨)의 원형을 되찾는 일일지도 모른다.

 

 

[이진서]

고석규비평문학관 관장

제6회 코스미안상 수상

lsblyb@naver.com

 

작성 2026.04.07 10:45 수정 2026.04.07 10: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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