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우리말에 ‘배알이 꼴린다’는 표현이 있다. 아니꼬워서 견딜 수 없다는 뜻으로 말이다. 하지만 꼴릴 배알이라도 좀 남아 있는 편이 낫지 않을까.
시인 김지하 씨의 글 ‘오적’이 실리는 바람에 폐간되고 말았지만 월간지 ‘思想界’의 당시 발행인 부완혁 선생님이 나에게 ‘무보수 게릴라 편집장’일을 부탁하시면서 글 쓰는 사람들 가운데는 집권 세력에 의해 발탁되기 위해 고의로 정부를 맹비난하는 글을 기고하는 사람들이 있으니 이런 사람들을 경계해야 한다고 하셨다.
옛날에 잠시 했던 신문기자 시절, 동료 기자들 가운데 유난스럽게 비분강개하며 위정자들을 헐뜯던 친구들이 얼마 안 가 해외공보관이다, 정부대변인이다, 청와대비서관이다, 권력 핵심의 주변 인물로 등장했다가 정부 여당의 전국구의원이나 장, 차관으로 출세 가도를 달리는 것을 보아 왔다.
이씨 왕조를 세운 이성계를 비롯하여 일정시대 친일한 인사들처럼 영어속담 대로 ‘이길 수 없거든 가담 합세해라’는 처세술에 능한 사람들이리라. 우리나라 역사를 돌이켜 볼 때 ‘이 몸이 죽고 또 죽어 일백 번 고쳐 죽어도’ 변절치 않는 정몽주를 이상주의자라 한다면 ‘이런들 어떠하며 저런들 어떠하리’의 이성계를 현실주의자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남들같이 어려서는 나도 정몽주를 존경토록 교육받았고 살아오면서는 ‘이런들 어떠하며 저런들 어떠하리’가 더 좀 성숙하고 현명하며 도통한 경지가 아닐까 하는 회의를 가져보기도 했지만, 사람은 역시 제 중심 배알을 빼버리지 말고 제 속맘 먹은 대로 자기 자신의 이상을 추구할 수밖에 없지 않을까 하는 결론을 얻게 되었다. 이광수같이 사느니 윤동주처럼 죽는 것이 훨씬 더 행복하리라.
한국의 현대자동차 창사 이후 초창기(1968)에 공채되어 내가 잠시 기획업무를 볼 때 당시 사장 비서로 있던 아가씨 말이 생각난다. 앞으로 결혼하게 되면 온종일 윗사람 밑에서 절절매거나 비실거리다 넋도 혼도 다 빠져 파김치가 되어 밤늦게 귀가하는 남편보고 절대로 바가지 긁지 못하겠노라고 했던 말이 생각난다.
하긴 한국 사회에서 출세하려면 자전거를 잘 타야 한다지만. 자전거 타듯 강자나 윗사람에게는 고개 깊이 숙여 ‘네, 네’ 굽실거리면서 아랫사람 약자는 짓밟고. 그렇다면 유유자적하는 수밖에 없겠구나. 몸은 그럴 수 없다고 해도 마음만이라도 말이다. 옛 선철 말씀 한두 마디 되새겨보자.
금은 광에서 캐내고 옥은 돌 다듬어 만들어진 것이니 변화를 거치치 않고는 참됨을 구할 도리 없으리라. 음주하는 곳에서도 도인을 만날 수 있고 가무하는 곳에서도 신선을 만날 수 있으니 고아(高雅)할지라도 범속을 떠날 수 없어 세속에 처하되 세속에 물들지 말지라. 부귀하면 남들이 나를 받드나 그것은 내 부귀를 받드는 것이고 빈천하면 나를 멸시하나 그것은 내 빈천함을 멸시하는 것으로 근본적으로 나를 받드는 것도 멸시하는 것도 아니니 좋아할 것도 언짢아할 것도 아니리라.
부귀공명 다 허례허식 허세요. 허상이니 얻어도 기뻐하지 말고 잃어도 걱정하지 말라. 유심정토(唯心淨土)는 속맘 마음씨 마음자리에 있으리니. 애오라지 배알부터 추스르고 볼 일이다.
[이태상]
서울대학교 졸업
코리아타임즈 기자
합동통신사 해외부 기자
미국출판사 Prentice-Hall 한국/영국 대표
오랫동안 철학에 몰두하면서
신인류 ‘코스미안’사상 창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