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계봉의 인문기행] 소박함이 주는 위로, 화순 운주사

여계봉 대기자

 

경사진 듯 평탄한 듯 쭉 곧은 듯 구부러진 듯 완만한 진입로에 촉감 좋게 다져진 흙길을 넉넉한 마음으로 천천히 걷다 보면 산사를 찾는 감칠맛이 느껴진다. 무수히 많은 사람들이 이 길을 오가면서 흘렸을 땀과 그들이 남긴 발자국들, 아름다운 추억과 간절한 기도가 배어 있는 비단길이다. 

 

‘구름이 머무는 절집’이라는 화순의 운주사(雲住寺) 일주문 현판을 보니 인생은 이 세상에 잠시 머물렀다 가는 한 조각의 구름이라는 사실을 새삼 깨닫는다. 일주문을 들어서자마자 오른쪽 석벽에 비스듬히 기대어 서있거나 앉아 있는 석불들을 보니 마치 오랫동안 집 떠난 나를 기다리고 있는 다정한 식구들 같다. 크기와 형태가 다양하고 얼굴이 투박하거나 비율이 어색한 석불이 많은데 오히려 그 점이 인간적인 매력을 더 느끼게 만든다. 검버섯 핀 할아버지 피부처럼 이끼를 안고 있는 모습을 보니 묻어나오는 세월의 무게감까지 더하여 경건한 마음이 절로 든다. 그래서 운주사에 가면 늘 마음이 편하고 따뜻해진다. 

 

운주사 골짜기에 흩어진 석불의 향연

 

고려시대에 창건된 것으로 알려진 화순의 운주사는 한마디로 파격적인 절이다. 가람의 배치가 우리가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상식에서 크게 벗어나 있기 때문이다. 절집 산자락과 너른 마당, 그리고 하천 사이에 수백 개의 석불과 석탑이 자연스럽게 흩어져있고 사이사이의 공간에 암자들이 자연스럽게 자리하고 있다. 마치 누군가 의도적으로 만들어 놓은 거대한 야외 석물 전시장 같은 느낌을 받게 된다. 진정한 하심(下心)이란 이런 돌덩이 앞에서도 무릎을 꿇을 수 있다는 자기 겸손을 절실하게 느끼게 만드는 공간이다.

 

운주사 원형다층석탑과 석조불감

 

운주사에는 흥미로운 전설 하나가 전해온다. 도선국사가 나라의 기운을 바로 세우고 백성들의 고통을 덜기 위해 하룻밤 사이에 천불천탑(千佛天塔)을 세우려는 거대한 불사를 시작했는데, 닭이 울어 날이 밝는 바람에 완성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이 전설을 소재로 한국 현대문학을 대표하는 작가 황석영은 소설 《장길산》을 쓰게 되는데, 거대한 소설의 끝을 이곳 운주사에서 마무리한다. 조선 중기 민초들의 세상을 꿈꾸었던 장길산과 반란군은 관군의 추격을 피해 운주사로 모여들고 새벽 첫닭이 울기 전 1,000개의 탑을 세우면 세상을 바꾼다는 전설에 따라 정성을 다하지만 마지막 와불을 세우기 전, 때 이른 닭의 울음소리로 그 염원은 실패로 돌아간다. 소설적 상상이 가미된 허구의 내용이지만 새로운 세상을 꿈꾸는 민초들의 절실한 염원은 세월이 아무리 흘러도 변함이 없다는 사실을 잘 나타내고 있다.

 

민초들의 얼굴을 새겨넣은 불상들

 

이들을 가만히 쳐다보고 있으면 석불 하나하나의 표정이 모두 다르다. 어떤 이는 미소를 띠고 있고, 어떤 이는 무표정하며, 또 어떤 이는 슬퍼 보이기도 한다. 마치 인간 군상들의 다양한 모습을 비추는 거울과도 같다는 느낌이 든다. 그리고 대부분 오랜 세월 풍파를 겪은 탓인지 이목구비를 제대로 갖춘 석불을 찾아보기 힘들다. 그래서 볼 때마다 부처님을 뵙는다기보다 골목에서 마주친 이웃을 만난다는 생각이 들어 더욱 정이 간다. 화려한 전각에 모셔진 부처님들은 너무 권위적이라 공연히 주눅 들 때가 있지만 운주사 석불들은 그렇지 않다. 완벽하지 않기에 쉽게 상처받고 힘들게 살아가는 백성들에게 더 깊은 울림을 주고, 그들의 아픔을 따뜻한 이웃의 눈길로 위로해 주기 때문이다. 

 

운주사 칠성바위(거북바위)와 다라니탑

 

운주사에서 가장 유명한 존재는 단연 ‘와불(臥佛)’이다. 대웅전에 먼저 들러 부처님께 삼배 올린 후 서쪽 능선에 있는 와불을 보기 위해 산책하듯 편안하게 숲길로 접어든다. 살갗을 부드럽게 어루만지는 바람과 숲에서 풍겨 나오는 향긋함, 그리고 전나무 잎새를 헤집고 들어오는 햇살들의 짜릿함을 실감하면서 거북바위가 있는 곳을 오른다. 운주사에는 거북을 닮은 바위가 있다. 바로 와불 가기 직전 관세음보살이 내려다보는 우뚝 솟은 마당바위가 바로 칠성바위(거북바위)다. 이 바위는 거대한 석탑인 다라니탑을 등에 짊어지고 있는데 영락없이 거북이 극락왕생을 바라며 서방정토로 가는 형국이다. 바위 아래로 내려가서 9기의 석불들을 친견하는데 유난히 눈길을 끄는 한 석불을 보고 그만 숨이 딱 멎는 순간을 경험한다. 마모될 대로 마모된 얼굴로 눈을 감은 채 영원을 바라보며 모든 것을 버린 듯 고요히 앉아 있는 석불의 모습에 울컥하는 감정이 치솟는다. 고통의 절정에서도 고요와 평온을 유지하고 있는 석불의 모습에서 형용하기 어려운 감동을 느꼈기 때문이리라. 

 

거북바위 아래 자리한 9기의 석불

 

거북바위에서 서쪽 능선에 자리한 와불을 향해 조금만 올라가면 전망대가 나온다. 전망대에서 정면을 바라보면 자연과 어우러지는 경내 석탑의 모습들이 너무도 아름답다. 그 너머로 펼쳐지는 작약산, 천태산, 개천산의 산세에 주위 절경 또한 뛰어나니 산 자체가 법당이며, 자연이 들려주는 이런저런 소리가 온갖 법문인 그런 곳이다. 운주사를 대표하는 거대한 와불은 언덕을 따라 하늘을 응시하며 누워있는데 마치 사이좋은 한 쌍의 부부처럼 보인다. 운주사 골짜기에 천불천탑을 세운 다음, 마지막으로 깊은 잠에 빠져 있는 듯한 이 와불이 자리를 박차고 일어서는 날, 새로운 미륵 세상이 도래한다는 이야기가 전해 오고 있다. 10여 년 전 몸과 마음이 피폐해져 이곳을 찾았을 때 삼배를 올리자 와불이 벌떡 일어나 두 팔을 벌리고 꼭 껴안아 주는 기분이 들었는데, 마치 어릴 때 엄마 품에 안겼을 때처럼 아늑하고 포근한 느낌이었다. 그 이후로 삶의 문턱에 걸려 넘어질 때마다 운주사 석불을 떠올리곤 했다. 

 

미륵불의 화신, 운주사 와불

 

절집을 나서는데 미처 눈길조차 마주하지 못했던 못생긴 석불이 한마디 던진다.

 

“여보게. 살다가 가끔 넘어지는 게 인생이라네.” 

 

 

[여계봉 대기자]

수필가

공학박사

이메일 : yeogb@naver.com

작성 2026.07.16 10:46 수정 2026.07.16 13: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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