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윤배 칼럼] 재벌, 성공을 넘어 ‘신뢰’로

이윤배

세계에서 가장 권위 있는 사전인 옥스퍼드 영어 사전에 ‘재벌’은 한글 그대로 ‘chaebol’이란 스펠링으로 등재돼 있다. 그리고 재벌을 “한국 대기업의 한 형태, 특히 가족 소유의 것”이라고 정의하고 있다. 다른 나라에서도 존재하는 재벌을 유독 ‘한국만의 특수한 경영 형태’라고 정의하고 있는 까닭은, 세계적으로 그 유래를 찾아볼 수 없는, 한국만의 독특한 가족 경영 기업 구조에 기인한다. 

 

우리나라 재벌의 탄생 과정은 출발부터 결코 정상적이지 않았다. 해방 이후 일제가 남긴 적산 기업을 미 군정과 이승만 정부에서 상대적으로 낮은 가격으로 팔아넘기면서, 재벌 형성의 토대가 마련되었다. 이후 박정희 정권의 산업화 정책과 정경유착 속에서 재벌은 비약적인 성장을 거듭하며 중소기업을 압도하는 새로운 경제 권력으로 부상했다. 그러나 이 같은 성장의 이면에 기업 문화와 윤리의식의 취약성이 구조적으로 고착되었다는 비판 또한 꾸준히 제기되어 왔다. 

 

오늘날 재벌들은 과거보다 경영 투명성이 나아졌다고는 하지만, 일부 재벌은 여전히 사회적 책임보다 이윤 추구에 더 치중하고 있음을 부인하기 어렵다. 총수 일가의 불투명한 지배 구조, 편법 상속, 그리고 반복되는 갑질은 더는 낯설지 않은 풍경으로 국민 뇌리에 깊이 새겨져 있다. 

 

대한항공의 ‘땅콩 회항’과 ‘물컵 갑질’ 사건은 재벌가의 일상적 행태를 드러낸 하나의 작은 사례에 불과하다. 특히 최근 신세계 그룹 산하 스타벅스가 5·18 민주화운동 기념일에 진행한 ‘탱크 데이’ 마케팅은 단순한 실수가 아니라, 역사적 아픔을 외면한 채 이윤만을 좇은 비도덕적 상행위의 전형이라고 할 수 있다. 결국, 불매운동이 확산되고 대표가 해임되는 등 기업 신뢰에 치명적인 타격을 입었다. 이 사건은 기업이 단순히 돈을 버는 존재가 아니라, 역사와 공동체에 대한 책임을 함께 지는 사회적 주체임을 다시금 일깨워주었다.

 

미국에서는 록펠러와 카네기, 빌 게이츠, 워런 버핏 등 거대한 부를 축적한 뒤 사회 환원에 적극적으로 나선 기업인들이 오랫동안 존경을 받아 왔다. 물론 이들 역시 성장 과정에서 이런저런 다양한 평가를 받고 있지만, 막대한 기부와 공익 활동을 통해 사회적 책임을 실천하려는 노력은 세계적으로 높은 찬사를 받고 있다. 이에 비해 우리 사회에서는 여전히 일부 재벌을 바라보는 시선에 경계와 불신이 남아 있다. 과거의 불투명한 성장 과정과 반복된 사회적 논란이 또렷하게 각인되어 있기 때문이다.

 

성경에는 “낙타가 바늘귀를 통과하는 것이 부자가 천국에 들어가는 것보다 쉽다.”라고 적혀 있다. 이 문구는 부 자체를 부정하기보다, 부를 축적하는 과정과 그것을 사용하는 태도에 더 큰 의미를 두고 있다. 우리 속담인 “개같이 벌어 정승같이 써라” 역시 같은 맥락에서 부의 축적보다 그 쓰임의 품격을 강조한 것이다. 오늘날 국민은 단순한 성공 신화보다 공정한 성장 과정과 진정성 있는 사회 환원에 더욱 큰 가치를 부여하고 있다.

 

재벌 중심의 세습 구조와 불투명한 의사결정, 그리고 끊이지 않는 갑질 논란은 결국 공동체의 신뢰와 충돌할 수밖에 없다. 그런데 신뢰는 재무제표에 기록되지 않는 무형의 중요한 자산이자, 기업의 지속 가능성을 좌우하는 핵심적 요소다. 이런 까닭에 한 번 잃은 신뢰를 회복하는 데는 오랜 시간이 필요하고 사회적 책임 또한 화려한 행사나 일회성 기부로는 절대 완성되지 않는다. 진정한 변화는 투명한 지배 구조와 공정한 거래 질서, 노동과 안전에 대한 책임 있는 투자, 그리고 꾸준한 사회 환원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무엇보다 존경은 요구하거나 돈으로 살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기업이 스스로의 힘을 절제하고, 이익을 넘어 공동체의 가치를 함께 고민할 때 자연스럽게 따라오는 결과물이다. 부가 단순한 축적의 상징을 넘어 나눔과 책임으로 이어질 때 기업은 경제 주체를 벗어나 사회를 밝히는 존재로 거듭날 수 있다.

 

성공한 기업은 많을 수 있지만, 존경받는 기업은 드물다. 따라서 한국 재벌들이 국민으로부터 진정한 존경을 받기 위해서는 과거를 반면교사 삼아 책임과 신뢰를 경영의 중심 가치로 삼아야 한다. 존경은 오직 그 길을 끝까지 걸어간 기업에만 주어지는 가장 소중하고 값진 자산이자 특권이다. 그리고 그것은 한 기업의 명예를 넘어 세대를 아우르며 국가와 사회를 지탱하는 힘이 될 것이다. 

 

이제 한국 재벌들이 선택해야 할 길은 더 큰 성공이 아니라 더 깊은 신뢰이며, 그것이 우리 국민이 진정으로 기대하고 소망하는 변화일 것이다.

 

 

[이윤배]

(현)조선대 AI·SW 학부 명예교수

조선대학교 정보과학대학 학장

국무총리 청소년위원회 자문위원 

호주 태즈메이니아대학교 초청 교수

한국정보처리학회 부회장 

이메일 : ybl7736@naver.com

 

작성 2026.07.14 10:01 수정 2026.07.14 1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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