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은숙 칼럼] 둥근 탁자처럼

민은숙

늦은 오후, 오래된 찻집 구석 자리에 가만히 앉아 있었다. 창가 틈새로 가끔 서늘한 가을 바람이 스며들었고, 문이 열리고 닫힐 때마다 저마다 다른 온도와 사연을 가진 소리가 공간을 채웠다. 누군가는 서둘러 들어와 빈자리를 두리번거렸고, 또 다른 이들은 말없이 차를 마시다 조용히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공간의 밀도와 공기는 매 순간 유동적으로 변하고 있었으나 그 번잡함 속에서도 꿈쩍하지 않는 풍경의 주인공이 있었다. 방 한가운데를 묵묵히 지키고 있는 둥근 나무 탁자였다.

 

사람이 바뀌고, 무수한 말들이 허공으로 흩어지고, 찻잔이 서서히 비워져도 탁자는 자리를 지켰다. 누구의 소유도 아니지만 그곳에 머무는 모두에게 든든한 중심이었다. 그 정경을 가만히 응시하고 있으니 《장자(莊子)》의 한 구절이 뇌리를 스쳤다. 고리의 한가운데를 뜻하는 말인 '환중(環中)'이다.

 

우리는 보통 '중심'이라고 하면 단단하고 변하지 않는 물리적인 형태를 떠올릴 것이다. 흔들리지 않는 기준, 혹은 확고한 신념 같은 것들이다. 장자가 말하는 중심은 그 결이 조금 다른 듯하다. 무엇을 꽉 움켜쥐고 고집하는 자리가 아니다. 오히려 텅 비워두었기에 세상의 모든 변화를 온전히 받아들일 수 있게 넉넉하다.

 

마차가 길을 구르는 거대한 바퀴를 그려 본다. 바퀴가 지치지 않고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까닭은 바큇살들이 안쪽으로 모여드는 그 한가운데 축을 받치는 빈 구멍이 투명하게 열려 있어서가 아닐까. 축 구멍이 막혀 있다면 바퀴는 이내 삐걱거리다 멈춰 서고 말 것이다. 삶도 마찬가지로 중심을 욕망으로 가득 채울수록 오히려 앞으로 나아가지 못한다. 눈에 보이지 않는 빈자리야말로 바퀴 전체를 굴리고 삶을 전진시키는 가장 강력한 동력이자 보이지 않는 핵심인 셈이 아닐까.

 

살다 보면 이 중심이 가진 힘을 절감하는 순간이 있다. 얼마 전, 여러 사람이 모여 자유롭게 의견을 나누던 자리에 있었다. 대화가 무르익어 갈 때쯤, 한 참석자가 자꾸만 대화의 성급한 결론을 내리고 흐름을 제 뜻대로 정리하려 들었다. 온화했던 방 안의 분위기가 순식간에 차갑고 딱딱하게 굳어버렸다. 이야기는 더 이상 자연스럽게 흐르지 못하고 툭툭 끊기며 침묵의 벽에 부딪혔다.

 

누군가 가만히 넌지시 한마디를 건넸다. "꼭 하나의 정답을 찾으려 조바심 내지 말고, 우리 물 흐르듯 흘러가게 두면 어떨까요?" 그 부드러움에 사방을 팽팽하게 죄고 있던 긴장의 끈이 풀렸다. 사람들은 편안하게 속내를 꺼내놓기 시작해 서로 다른 색깔의 생각들이 자연스레 연결된 하나의 풍경을 이루었다. 처음 의도했던 것보다 훨씬 풍성하고 아름다운 결론에 도달할 수 있었다. 중심을 한 사람이 독점하려 하지 않았기에 나온 비움의 지혜였을 것이다.

 

환중이 고요히 비워둔 중심의 자리라면, 수성은 그 비움이 스스로 움직이기 시작할 때 일어나는 일이다. 비워진 축 구멍이 있어야 바퀴가 구르듯, 중심을 비워두어야 비로소 흐름이 그 안으로 들어와 자연스럽게 길을 낸다. 억지로 끌어당기거나 밀어내지 않고 순리에 몸을 맡기는 것으로 상황이 스스로 이루어지도록 따르는 것이 '수성(隨成)'이다. 환중이 없다면 수성도 없다. 비움이 먼저 흐름은 그다음이다.

 

삶의 많은 순간, 내 뜻대로 통제하려 손아귀에 힘을 줄수록 모래알은 손가락 사이로 잘 빠져나간다. 관계는 어긋나고 일은 꼬인다. 반면 도도한 흐름을 인정하고 물결을 따라갈 땐 얽힌 실타래가 스르륵 자연스럽게 풀리는 경이로운 경험을 만난다.

 

찻집에서 시선을 돌려본다. 한 곳에서는 활짝 웃으며 다정한 이야기를 나누고 다른 곳에서는 조용히 책장을 넘기며 사색에 잠긴다. 또 다른 이는 잠시 땀만 식히고 곧 자리를 뜬다. 만약 이 공간이 무조건 조용해야 한다거나 반드시 밀도 높은 대화를 나눠야 한다는 엄격한 규칙을 강요했다면, 누구도 머물고 싶지 않은 곳이 되었을 터이다. 찻집의 중심이 둥글게 비어 있다. 

 

각자의 삶의 방식이 있는 그대로 존중되고 허용돼 다양한 풍경들이 교차하며 특유의 편안하고 아늑한 질서를 만들어낸다. 억지로 맞추지 않았으나 스스로 조화를 이루는 상태는 수성의 아름다운 미학이다.

 

중심을 비워두었기 때문에 다가오는 흐름에 유연하게 따를 수 있으며 흐름을 너그럽게 따르기에 내 중심이 고집스럽게 굳어지거나 부러지지 않는다. 우리가 중심을 내 것이라 꽉 붙잡는 순간, 나를 옥죄는 하나의 거대한 고집이 되고 말 것이다.

 

흔들리는 거친 세상 속에 우리는 중심을 단단히 잡아야 한다고 채찍질하며 살아간다. 물론 중심은 필요하다. 그러나 그 중심이 부러질 듯 단단해지기만 한다면, 급변하는 삶의 계절과 모진 바람에 유연하게 대처할 수는 없다. 장자의 중심은 형태가 없어 그 어떤 거센 변화도 넉넉히 품어 안는다.

 

어느덧 해가 뉘엿뉘엿 저물어가는 찻집에서 일어섰다. 문은 여전히 밀물과 썰물처럼 열고 닫히며 저마다의 애틋한 사연을 안고 바삐 오고 간다. 둥근 나무 탁자는 변함없이 그 자리에 머물러 있다. 방 안의 모든 공기의 흐름이 그 주변에서 가장 편안하고 자연스럽게 흐르고 있다.

 

팍팍한 이 세상을 살아가며 우리가 지켜내야 할 삶의 중심도 바로 이런 모습이어야 하지 않을까. 무언가를 움켜쥐기보다 기꺼이 비워두는 여백을 품을 때, 삶은 아름답게 흘러가며 온전한 제 모습을 찾아갈 것이다.

 

 

[민은숙]

시인, 칼럼니스트

제4회 코스미안상

제3회 문학뉴스 &시산맥 기후환경문학상

2024 중부광역신문신춘문예

청주시 1인 1책 펴내기 지도 강사

꿈다락학교 시 창작 강사

문화재단 & 예술재단 창작지원금 수혜

이메일 : sylvie70@naver.com

 

작성 2026.06.10 10:22 수정 2026.06.10 1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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