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벼락을 둘러싼 능소화의 짙은 초록잎 사이로 주황색 꽃봉오리가 보이니 어느 날 아침 한두 송이 피어나겠지요. 한낮 볕은 뜨거운데 아침저녁으로는 선선한 기운이 상쾌하고 간간이 들리는 여러 종류의 새소리가 청명합니다. 앵두도 빨갛게 익었지요. 텃밭 양파는 줄기를 누이어 수확을 기다리고 상추는 너풀너풀 풍성합니다.
각자의 생장 속도로 봄의 끝자락을 건너고 있는데요.
올해로 8살인 레브라도 레트리버 사랑이에게 이 봄은 마지막 계절이 될듯합니다. 피부암 말기를 견디고 있기 때문입니다.
사랑이는 화낼 줄 모릅니다. 13살 진도와 쉽독에 눌려 산책을 못하고 기다리던 시간에도 눈꼬리를 내려 물끄러미 바라볼 뿐, 아침에 눈을 뜰 때, 외출할 때 그리고 귀가해서는 달려드는 세 마리중 가장 늦게 쓰다듬어질 때까지 인형을 물고 꼬리 흔들며 자기 차례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막내라 늦게까지 사랑할 시간이 남아있을 줄 알았지요.
몸에 열이 많아 더운 날 산책을 다녀오면 목줄을 풀 새도 없이 마당 한쪽에 마련해 둔 간이수영장에 뛰어들고 한여름밤 풍덩 소리가 나면 여지없이 혼자 입수해서 수영장 한가운데 앉아있던 모습이 눈에 선합니다.
또 사랑이는 출입문이 다른데요. 개구멍으로 아무 때나 드나들 수 있는 집인데 사랑이만 유독 개구멍으로 나가면 들어오지 않습니다. 언제부턴가 늘 따라다니던 녀석이 안 보인다 싶어 찾으니 현관문 옆에 크게 뚫린 창으로 안을 들여다보고 있는 겁니다. 눈이 마주치자 현관문 쪽으로 급히 달려옵니다. 등을 만져보면 얼마나 기다렸는지 알게 됩니다. 추운 날은 차갑게 더운 날은 뜨겁게 만져지니 말입니다. 알아봐 줄 때까지 하염없이 기다린 겁니다.
사랑이가 앉아있던 그 자리가 많이 허전해지겠지요.
며칠 전 사랑이가 죽을 고비를 넘겼습니다. 갑자기 걷지도 눕지도 못하고 앉아서 졸고 있다가 겨우 바닥에 몸을 누이고는 다시 안간힘을 써서 걸으려 하는 모습을 지켜봐야 했습니다. 저도 나도 잠을 설친 다음날 한쪽 다리가 심하게 부어오르면서 절뚝거리기까지 했습니다. 시시각각으로 변하는 몸의 증상으로 갑자기 맞이하는 죽음에 어찌할 바를 몰랐는데요. 신기하게 며칠 만에 걷습니다. 그리곤 자꾸 나가자 합니다. 그동안 못했던 산책을 하자는 건지 절뚝거리며 가고 싶은 방향을 잡아갑니다. 산책을 하면서 활력이 생긴듯하다가도 새벽에 진통제를 먹여야 하는 일들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먹는 것도 하나씩 내려놓습니다. 좋아하던 바나나도 싫다 하고 소고기도 오리고기도 닭고기도 연어도 모두 외면하고 지금은 삶은 달걀만 찾습니다.
걸을 수 있다는 거 먹을 수 있다는 거 숨을 쉰다는 게 기적이라는 말이 매 순간 떠오르는데요. 그 무엇보다 ‘나’는 ‘나’밖에 모른다는 사실을 알아갑니다.
사랑이의 거친 호흡에 감정이 북받치다가도 한 달 전 친목 모임에서의 ‘나’의 말과 행동을 검열하고 있는 겁니다. 이렇게 말했더라면 더 나아 보이지 않았을까라고 말이지요. 남을 배려한다 여겼던 순간들도 모두 나에게 이익이어서 선택한 것들이라는 걸 조금은 알 것 같습니다.
이기적인 내가 잘나 보이고자 했던 자기 검열은 오히려 내 이익에 반하는 거겠지요. 남 눈치보기였을 테니 말입니다. 내 좋아서 한 언행이니 그대로 문제없다 하렵니다. 사랑이와의 8년도 내 좋아서 맺은 인연이니 이별의 슬픔도 온전히 내 것 이어야지요. 내 좋아서 한일이니.
사진; 2026년 6월6일 능소화. 최영미
K People Focus 최영미 칼럼니스트 (ueber35@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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