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은숙 칼럼] 차마로 깨우는 마음

민은숙

사람은 불인지심(不忍之心)을 가지고 있다. 글자 그대로 풀면 '차마 하지 못하는 마음'이다. 忍은 '참을 인'이지만, 불인지심은 참지 못하는 마음이 아니라 오히려 그 반대이다. 차마 외면하지 못하는 마음으로 차마 모른 척할 수 없는 마음이다.

 

'차마'라는 말에는 묘한 힘이 있다. 논리가 아니라 감각에서 온다. 머리가 판단하기 전에 몸이 먼저 반응하는 어떤 것이다. 제나라 선왕은 제물로 끌려가며 두려움에 떨고 있는 소를 만났다. 그 자리에서 걸음을 멈춘 왕은 벌벌 떠는 소를 놓아주라 명하며 소 대신 양을 쓰라 했다. 백성들은 이를 두고 큰 것을 작은 것으로 삼은 인색함으로 보았으나 맹자는 차마 보지 못하는 마음으로 읽었다. 직접 본 소를 불쌍히 여긴 어진 마음이라고 격려했다. 왕은 마음을 선택한 것이 아닌 소를 마주하는 순간에 이미 일었다. 의지가 아니라 본성이었다.

 

비가 내리는 어떤 날의 버스 정류장이 스쳐 지나간다. 우산도 없이 비를 맞으며 서 있는 노인이 있었다. 지나치던 누군가 잠깐 걸음을 늦추었다. 우산을 함께 쓸까, 하는 마음이 잠깐 일었으나 이내 다른 생각에 밀려 사라졌다. 버스가 곧 오겠지, 괜히 나서서 지체될 수 있어, 바쁜데. 걸음은 다시 빨라지고 노인은 멀어졌다.

 

불인지심이 완전히 사라진 것일까. 걸음을 늦춘 그 찰나, 마음은 분명 깨어났다. 그러나 곧바로 다른 목소리가 그것을 눌러버렸다. 맹자의 언어로 말한다면, 불인지심은 사라진 게 아니라 잠들어 있는 게다. 아니, 덮인 게다. 덮는다는 것은 참 무서운 일이다. 사라진 것은 되살릴 수 없지만, 덮인 것은 언제든 다시 걷어낼 수 있다는 점에서 희망처럼 보인다. 그러나 덮개가 두꺼워질수록 그 아래에 무엇이 있었는지조차 잊게 될 수 있다. 덮임은 소멸보다 조용한 만큼 더 위태롭다.

 

SNS 타임라인을 내리다 보면 고통도 흘러간다. 전쟁터의 아이, 이상 폭우에 잠긴 마을, 파도에 휩쓸린 바다의 죽음들에 손가락은 잠시 멈추고 가슴 한켠이 저린다. 그러나 이내 다음 콘텐츠로 넘어간다. 슬픔은 소비되었으나 행동은 쉽게 뒤따르지 않는다. 냉담일까, 포화의 문제일까. 매일 수십 개의 참상이 화면을 통해 쏟아진다. 불인지심이 자주 두드려지는 마음은 어느 순간 스스로 문을 닫아버리게 된다.  일종의 자기 보호일 수도 있다. 다만, 그 문을 닫은 채로 우리는 조금씩 달라져 간다.

 

화면 속 고통은 실재하지만, 그것을 바라보는 우리는 언제나 안전한 자리에 있다. 그 거리에서 불인지심이 행동으로 이어지는 회로를 소리 없이 끊긴다. 공감이 소비로 완결될 때, 우리는 느꼈다는 사실만으로 이미 충분히 반응했다고 여길 수 있다. 어쩌면 가장 정교한 형태의 외면일 수 있다.

 

측은지심이 이 시대에 더 어려워진 까닭을 하나로 단정 짓기는 어렵다. 공감에 시간을 들이는 사람이 뒤처진다는 감각이 일상을 지배할 때, 불인지심은 사치처럼 여겨질 수 있다. 남을 돕는 건 원하면 하는 자유처럼 들린다. 그 안에는 이미 불인지심이 선택지로 바뀐 논리가 조용히 들어앉아 있다.

 

맹자에게 불인지심은 선택이 아니었다. 그것은 인간이 인간일 수 있는 근거였다. 소 앞에서 발을 멈춘 왕의 마음처럼, 논리보다 먼저, 설명보다 먼저 찾아오는 것이었다. 어떤 마음은 이유를 따지기 이전에 먼저 와야 한다. 그 순서가 뒤집힐 때, 측은지심은 점점 낯선 감각이 되어간다.

 

불인지심은 피어날 수 없는 걸까. 그 마음이 행동으로 번지려면, 먼저 그 마음이 일 때 묻어버리지 않아야 한다. 어차피, 라는 말로 그 마음을 재우지 않고 덮개를 얹기 전에 잠시 그 마음을 들여다보는 것이다. 불인지심은 타인을 위한 감정이기 이전에, 스스로를 사람으로 붙드는 마음이다. 우리가 누군가의 고통 앞에서의 잠시 멈춤은 상대만을 위한 게 아니다. 자기 자신에게 건네는 질문이기도 하다.

 

맹자는 측은지심을 仁의 시작이라 했다. 완성이 아니라 시작이다. 시작은 언제든 가능하다는 뜻이다. 빗속에 서 있는 누군가와 눈이 마주쳤을 때, 화면 속 얼굴 앞에서 손가락이 멈추었을 때, 그 순간은 끝이 아니라 시작이 될 수 있다. 차마, 외면하지 않는 그 찰나로부터 시작이다.

 

 

[민은숙]

시인, 칼럼니스트

제4회 코스미안상

제3회 문학뉴스 &시산맥 기후환경문학상

2024 중부광역신문신춘문예

청주시 1인 1책 펴내기 지도 강사

꿈다락학교 시 창작 강사

문화재단 & 예술재단 창작지원금 수혜

이메일 : sylvie70@naver.com

 

작성 2026.05.27 09:36 수정 2026.05.27 09: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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