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곽흥렬 칼럼] 오늘도 무사히

곽흥렬

저물손이다. 저쪽 멀리서 사람 형상의 물체 하나가 가물가물 눈에 들어온다. 어렴풋이 윤곽선만 보일 뿐 남잔지 여잔지, 젊은인지 늙은인지 가늠이 되지 않는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서로의 거리가 시나브로 좁혀지면서 환청처럼 아득히 들리던 발자국 소리가 또렷해진다. 그리고 몇 분 뒤, 서로의 숨결이 느껴지는 지점에까지 이르렀을 때 비로소 형상의 정체가 확연히 드러났다. 

 

평소 면을 트고 지내는 스님이었다. 회갈색 장삼에다 암적색 가사를 걸쳤다. 파르라니 깎은 머리에 밀짚모자를 눌러쓰고 등에는 바랑을 메었다. 스님임을 알아본 순간 내 두 손은 나도 모르게 가슴께로 모아졌다. 

 

길을 가다 스님만 만나면 나는 어김없이 합장을 하고서 반배를 올린다. 어쩌다 알고 지내는 스님과 마주치게 되는 수도 없진 않지만, 전혀 낯모르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내가 굳이 불교 신자여서 이 같은 행동을 취하는 건 아니다. 그저 평소 스님들을 향한 존경과 감사의 마음이 저절로 우러나오기 때문이다. 

 

윤리 도덕이 땅에 떨어져서일까, 요즘 세상은 최후의 정신적 보루인 종교마저 타락하여 구도자다운 구도자를 찾기가 어렵다는 이야기를 많이 듣는다. 하루가 멀다고 터지는 그네들의 갖은 비리와 비행 소식을 접하면서 그런 비판의 목소리에 일견 고개가 끄덕여지는 면이 없진 않다. 하지만 어느 사회, 어떤 집단엔들 미꾸라지야 항시 있어 온 것 아니던가. 누가 뭐라 하든, 대다수의 구도자는 치열하게 수행의 길을 가는 분들이라는 나의 신념에는 조금치의 흔들림도 없다. 다른 한편으로 생각해 보면, 그래도 그분들이 존재하기에 각다귀 같은 세상이 그나마 이 정도라도 평형을 잃지 않고 지탱해 나가지 않을까 싶어지기도 한다. 

 

지금은 추억 속의 풍경이 되어 버렸지만, 우리가 어렸을 적만 해도 버스를 탈 때면 운전석 앞 유리창에 붙은 참 귀한 글귀 하나를 심심찮게 만나곤 했었다. 무릎을 단정히 꿇은 채 두 손을 꼬옥 모아 쥐고 하늘을 우러러 간절히 기도하는 모습의 소녀상과 함께 적힌 ‘오늘도 무사히’라는 문구였다. 날이면 날마다 하루 종일 승객들을 태워 나르느라 버스 기사들은 얼마나 고단하고 힘에 부쳤을까. 몸과 마음이 지칠 때마다 그 글귀를 보면서 다시금 기운을 내곤 하였을 게다. 아니, 소녀상의 글귀가 비단 기사 혼자만의 안전을 위해 거는 자기최면의 기도라 할 수만은 없었으리라. 오히려 버스 안 승객들인 불특정 다수의 무사를 비는 기원의 의미가 아니었을까. 

 

스님들을 만날 때마다 내가 깍듯이 예를 갖추는 것도 바로 그 선지식들이 사진 속의 소녀처럼 우리 같은 중생을 위해 매일같이 축원을 올려 주기 때문이라는 생각에서이다. 불가에서 드리는 염불 기도는 자기 혼자만 잘되고 복 받으며 살고 싶다는 이기심의 발현이 결코 아니다. 거기에는 내가 행하는 이 기도가 널리 일체중생에게 미쳐져서 모두 함께 열반의 언덕에 이르기를 염원하는 보살심이 깃들어 있다. 

 

지난날 내 불교에 대한 알음알이가 일천日淺했던 시절에는 출가승으로 사는 삶이 세상사 가운데 가장 쉬운 줄로 알았다. 남들은 하루하루 전쟁터 같은 생존의 현장에서 살아남기 위해 발버둥이치는데, 노상 산 좋고 물 좋은 곳에서 신선놀음하듯 가만히 앉아 염불이나 외고 명상이나 하며 지내니 천지에 그보다 더 편한 일이 없을 것 같이 여겨졌었다. 어머니가 생전에 이따금 “중노릇, 그것 아무나 할 수 있는 거 아니다”라고 하셨을 때도 ‘뭐 그러려고?’ 싶어 도무지 믿으려 들지 않았다. 한 해 두 해 삶의 나이테가 감기면서 알량한 식견이나마 생겨나고, 조금씩 그 비밀스러운 세계를 알아가게 되면서 세상에는 승려로 지내는 일만큼 겨운 삶도 없을 것이라는 사실을 비로소 깨달을 수 있었다. 

 

스님들은 뭣 때문에 지난至難한 고행의 길을 자청하여 걸어가려는 것일까. 아침저녁으로 행해지는 예불 소리를 들으면서 오래 품어 온 의문이 풀렸다. 추우나 더우나 좋은 날이나 궂은 날이나, 어느 하루도 거르지 않고 부처님 앞에 올리는 그 기도 속에는 자기 자신에게로 향하는 이기심보다는 일체중생의 평안과 행복을 비는 간절한 발원이 깃들어 있었던 게다. 그 회향의 기도 덕분으로 나는 이날 이때까지 ‘오늘도 무사히’ 지내오게 된 것이 아닌가 싶어진다. 이 무주상보시의 은공을 무엇으로 갚음할 수 있으랴. 스님만 만나면 올리는 나의 합장 공경에는 거기에 그저 반푼어치라도 보답이 되었으면 하는 어쭙잖은 소망이 담겼다.

 

오늘은 내가 나와 아무 상관이 없어 보이는 이들에게 ‘오늘도 무사히’를 마음속으로 외우며 기도한다. 아니, 아무 상관이 없는 게 아니다. 연기법으로 헤아리면 세상천지 그 무엇인들 인연의 사슬로 얽히고설키지 않은 것이 어디 있겠는가. 

 

지금 이 순간 세월의 강물에 실려 흘러가고 있는 모든 목숨 가진 존재들이여! 

 

“부디 오늘도 무사히……”

 

 

[곽흥렬]

1991년 《수필문학》, 1999년《대구문학》으로 등단

수필집 『우시장의 오후』를 비롯하여 총 12권 펴냄

교원문학상, 중봉 조헌문학상, 성호문학상, 

흑구문학상, 한국동서문학 작품상 등을 수상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창작기금 받음

제4회 코스미안상 대상 수상

김규련수필문학상 수상

유혜자수필문학상수상

이메일 kwak-pogok@hanmail.net

 

작성 2026.05.22 10:17 수정 2026.05.22 10: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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