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계봉의 인문기행] 무량수전 배흘림기둥에 기대서서 

여계봉 대기자

 

요즘 관람객 1,600만을 훨씬 넘어선 영화 '왕과 사는 남자'의 주 무대인 영주와 영월을 찾는 사람들이 크게 늘고 있다. 4월 중순의 어느 봄날, 영주 부석사 가는 길에 들린 우리나라 최초의 사액서원 소수서원(紹修書院)에 들어서니 만화방창(萬化方暢) 봄꽃들이 나그네를 잠시 혼절하게 만든다. 서원 한가운데를 흐르는 죽계천은 단종 복위 운동으로 목숨을 잃은 충절의 선혈이 봄꽃보다 더 붉고, 근처에 있는 금성대군 신단에는 금성대군과 순흥부사 이보흠의 넋이 봄날의 아지랑이가 되어 피어오른다.

 

소수서원 한가운데를 흐르는 죽계천

 

'무량수전, 안양루, 조사당, 응향각들이 마치도 그리움에 지친 듯 해쓱한 얼굴로 나를 반기고, 호젓하고도 스산스러운 희한한 아름다움은 말로 표현하기가 어렵다. 나는 무량수전 배흘림기둥에 기대서서 사무치는 고마움으로 이 아름다움의 뜻을 몇 번이고 자문자답했다. 기둥의 높이와 굵기, 사뿐히 고개를 든 지붕 추녀의 곡선과 그 기둥이 주는 조화, 간결하면서도 역학적이며 기능에 충실한 주심포의 아름다움, 이것은 꼭 갖출 것만을 갖춘 필요미이며, 문창살 하나 문지방 하나에도 비례의 상쾌함이 이를 데가 없다. 눈길이 가는 데까지 그림보다 더 곱게 겹쳐진 능선들이 모두 이 무량수전을 향해 마련된 듯 싶어진다.'

 

-최순우의 '무량수전 배흘림기둥에 기대서서' 중에서

 

백두산에서 시작한 산줄기가 태백산에서 멈추고 방향을 바꾸어 서남쪽으로 비스듬히 달려 이룬 것이 소백산맥이다. 태백산에서 뻗은 줄기는 구룡산, 옥석산, 선달산으로 솟구치다가 소백산으로 이어져 형제봉, 국망봉, 비로봉, 연화봉을 이룬다. 선달산에서 다시 서남쪽으로 뻗은 줄기에 봉황산이 있고 그 아래에 부석사가 있다. 동쪽으로는 문수산, 남쪽으로는 학가산의 맥이 휘어들고 서쪽으로 소백산맥이 휘어 돌아 거대한 울타리를 이루고 있는 가운데 위치하여 뭇 산의 크고 작은 봉우리들이 봉황산을 향하여 읍하고 있는 형상이다. 풍수지리상으로도 봉황산과 부석사는 뛰어난 길지에 속한다. 

 

건축가들에게 한국 전통 건축의 특성을 가장 잘 느낄 수 있는 사찰을 말하라면 대개 영주 부석사를 첫손가락에 꼽는다. 그만큼 부석사는 전통 건축에서 느낄 수 있는 멋과 맛을 모두 갖추고 있다. 676년 신라시대 의상 조사가 창건한 이후 고려와 조선시대를 거치면서도 법등이 끊기지 않은 오랜 역사성, 이 절만이 갖는 독특한 공간 구조와 장엄한 석축단, 당당하면서도 우아함을 보이는 세련된 건물들, 오랜 세월을 거치며 단련된 대목을 비롯한 많은 장인들의 체취가 배어날 듯한 디테일은 부석사가 우리나라 사찰 가운데 으뜸을 차지하게 하는 요소들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부석사의 우수한 건축미는 서양의 건축과 문화에 식상한 우리에게 가슴이 확 트일 만큼 시원한 청량제가 될 뿐 아니라 우리에게 전통을 계승해 나갈 방향까지도 제시한다. 이런 맥락에서 부석사는 진정한 한국 건축의 고전(古典)이라 하여도 지나치지 않는다.

 

가람의 기승전결 '기(起)'에 해당하는 부석사 일주문

 

산지나 구릉에 지어진 우리나라의 사찰은 대부분 길게 늘어진 공간 구조를 가지고 있다. 중심축을 따라 입구에서 안으로 들어갈수록 공간의 높낮이가 높아지도록 배치되어 있는 소위 기승전결(起承轉結)의 구성인데 부석사도 예외는 아니다. 사찰 입구에서 천왕문까지의 도입 공간이 '기(起)'라면 대석단 위 범종각까지가 전개해 나가는 공간인 '승(承)'에 해당되고, 여기서 축이 꺾여 전환점을 맞는 안양문까지가 '전(轉)'의 공간이다. 안양루와 무량수전은 가람의 종국점이므로 '결(結)'이라 할 수 있다.  

 

부석사가 들어선 터는 그리 넓은 편이 아니다. 그나마도 구릉지에 위치하고 있어 경사가 심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작 부석사에 들어서면 협소하다는 느낌이 들지 않는다. 오솔길을 따라 절에 들어서면 높직한 석축단에 의하여 구분된 터에 드문드문 건물이 배치되어 있어 뒤돌아볼 여유를 가질 수 있고 내려가는 길에는 건물 지붕 위로 보이는 전면의 조망이 시원스럽게 펼쳐지기 때문이다. 

 

부석사에는 2개의 누각이 있는데 안양루와 범종각이다. 문의 성격을 겸한 안양루가 석축 위에 작고 날아갈 듯하게 지은 누각이라면 대석축단과 안양루 석축으로 구분되는 공간의 중심에 위치하고 있는 범종각은 지반에 견고하게 버티고 선 안정감 있는 건물이다. 건물의 지붕은 한쪽은 맞배지붕을 하고 있고 다른 한쪽은 팔작지붕을 하고 있는데 자세히 보지 않으면 지나치기 쉽다. 팔작지붕을 한쪽이 정면을 향하고 있고 맞배지붕이 뒤쪽을 향하고 있는데 무량수전 앞에서 바라보면 왜 목수가 지붕을 그리했는지를 알 수 있으며 그 지혜에 절로 감탄이 난다.

 

 '사물(범종, 법고, 목어, 운판)'의 울림을 연주하는 범종각

 

안양루(安養樓)는 무량수전 앞마당 끝에 놓인 누각이다. 정면 3칸, 측면 2칸 규모의 팔작지붕 건물로 무량수전과 함께 이 영역의 중심을 이루고 있다. 이 건물에는 위쪽과 아래쪽에 달린 편액이 서로 다르다. 난간 아랫부분에 걸린 편액은 '안양문'이라 되어 있고 위층 마당 쪽에는 '안양루'라고 씌어 있다. 하나의 건물에 누각과 문이라는 이중의 기능을 부여한 것이다.

 

극락으로 들어서는 관문인 안양문

 

'안양(安養)' 은 극락이므로 안양문은 극락 세계에 이르는 입구를 상징한다. 따라서 극락세계로 들어가는 문을 지나면 바로 극락인 무량수전이 위치한 구조로 되어 있다. 안양루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면 엎드려 있는 경내 여러 전각들 지붕 너머로 멀리 펼쳐진 소백의 연봉들이 한눈에 들어온다. 아스라이 보이는 소백산맥의 산과 들이 마치 정원이라도 되듯 외부 공간이 확장되어 다가온다. 안양루에 올라 바라보는 풍광은 부석사 전체에서 가장 뛰어난 경관이라 예부터 많은 문인들이 안양루에서 바라보는 소백의 장관을 시문으로 남겼고 그 현판들이 누각 내부에 걸려 있다.

 

시인 묵객들이 즐겨 찾았던 안양루

 

무량수전(無量壽殿)은 국보 제18호로 부석사의 주불전이며 아미타여래를 모신 전각이다. 아미타여래는 끝없는 지혜와 무한한 생명을 지녔으므로 무량수불로도 불리는데 '무량수(無量壽)'라는 말은 이를 의미하는 것이다. 무량수전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랫동안 현존하는 건물 가운데 하나이다. 안동 봉정사 극락전이 가장 오래된 목조 건축물로 알려져 있지만 건물 규모나 구조 방식, 법식의 완성도라는 측면에서는 무량수전에 비하여 다소 떨어진다. 그러므로 무량수전은 고대 불전 형식과 구조를 연구하는데 있어서 기준이 되는 중요한 건물이라고 할 수 있다.

 

아미타여래를 모신 무량수전

 

무량수전은 정면 5칸, 측면 3칸 규모인데 평면의 경우 건물 내부의 고주 사이에 형성된 내진 사방에 한 칸의 외진을 두른 형식을 취했다. 기둥 사이의 주칸 거리가 크고 기둥 높이도 높아 건물이 당당하고 안정감 있게 지어졌다. 지붕은 팔작 형식인데 지붕의 물매는 후대 건물에 비하여 완만하다. 무량수전 배흘림기둥은 기둥의 가운데가 가장 직경이 크고 위와 아래로 갈수록 직경을 점차 줄여 만든 기둥으로 묘한 비율의 곡선 체감을 갖는다. 장구한 세월에 센 머리 빛 도는 고색창연한 배흘림기둥에 살며시 기대본다.

 

무량수전의 배흘림기둥. 편액은 고려 공민왕의 글씨다. 

 

무량수전 왼쪽 뒤로 부석사의 창건 설화가 담긴 '부석(浮石)'이라 불리는 커다란 바위가 하나 있다. 설화에 따르면 의상이 봉황산 자락에 절을 지으려 했으나 도둑들이 나타나 불사를 방해하였는데, 평소 의상을 흠모하던 선묘낭자가 용으로 변해 커다란 바위를 공중으로 올렸다 내렸다를 반복했더니 도둑들이 두려움을 느껴 물러나자 의상은 그 자리에 절을 짓게 되고 돌이 공중에 떴다 하여 절 이름을 부석사라 하였다 한다. 바위 왼쪽 끝부분에 '浮石'이라고 새겨져 있다.

 

부석사의 창건 설화가 담겨있는 부석

 

부석사의 절정인 무량수전은 그 건축의 아름다움도 대단하지만 무량수전에서 내려다보이는 경관 또한 장관이다. 안양루 아래로 부석사 당우들이 낮게 내려앉아 마치 저마다 독경을 하고 있는 듯하고, 저 멀리 소백산맥 연봉들이 남쪽으로 치달리는 산세는 일망무제로 펼쳐진다. 이 웅대한 스케일, 대간의 연릉을 마치 무량수전의 앞마당인 것처럼 끌어안은 것이다. 이것이 바로 현세에서 감지할 수 있는 극락의 장엄이 아닌가.

 

무량수전 앞마당에 펼쳐지는 소백의 파노라마

 

절집을 내려서니 소백산 줄기가 우리를 따라 풍기 읍내까지 따라나선다. 석양이 소백산과 태백산을 잇는 대간의 마루금에 살짝 내려앉자 그 겹겹의 능선이 살아 움직이고 나그네는 소스라치는 기쁨과 놀라운 감동으로 전율한다.

 

 

[여계봉 대기자]

수필가

공학박사

이메일 : yeogb@naver.com

작성 2026.04.18 10:11 수정 2026.04.18 10: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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