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용대 칼럼] 묘비명, 한 줄의 생애

문용대

사람의 생애를 가장 짧게 요약하는 문장은 어쩌면 묘비명일지 모른다. 길게 설명하지 않아도, 한 줄이면 충분하다. 그 사람이 무엇을 믿었는지, 어떻게 살았는지, 누구를 사랑했는지가 그 짧은 문장 안에 모두 담겨 있기 때문이다. 묘비명은 죽은 사람의 이야기를 새긴 문장이지만, 실은 살아 있는 우리에게 남겨진 질문이기도 하다. 

 

“너는 무엇을 위해 살고 있느냐.”

 

나를 붙잡는 문장이 하나 있다. “헨리는 꿈을 꾸는 사람이었고, 아내는 기도하는 사람이었다.” 짧지만, 한 사람의 인생과 한 가정의 온기가 그대로 전해진다. 그 문장은 미국 대통령 우드로 윌슨이 첫 번째 부인 엘렌 엑슨 윌슨을 기리며 남긴 말로 전해진다. 한 사람은 세상을 향해 길을 열었고, 다른 한 사람은 그 길이 무너지지 않기를 기도했다.

 

 윌슨은 학자 출신의 대통령이었다. 프린스턴 대학교 총장을 지냈고, 세상을 근본부터 바꾸고 싶어 하던 이상주의자였다. 제1차 세계대전이 세상을 피로 물들일 때, 그는 단순한 승리가 아니라 “다시는 전쟁이 없는 세상”을 꿈꾸었다. 그가 내세운 민족자결주의와 국제연맹 구상은 결국 국제연합(UN)의 씨앗이 되었다. 그러나 그 이상 옆에는 언제나 엘렌이 있었다. 그녀는 화가로서 사람들의 모습을 따뜻한 색으로 그려 냈고, 가난한 이들을 위해 시간을 내곤 했다. 무엇보다 남편의 불안과 고독을 알아주는 사람이었다. 윌슨이 정치적 공격과 좌절 속에서 흔들릴 때마다, 그녀는 말없이 그의 곁에서 기도했다.

 

1914년, 엘렌이 세상을 떠났을 때 윌슨은 “내 세상이 무너졌다”고 말했다. 그래서 그 문장, “헨리는 꿈을 꾸는 사람이었고 아내는 기도하는 사람이었다”는 단순한 추모가 아니라 깊은 고백일 것이다. “내가 감히 세상을 바꾸려 할 수 있었던 것은 당신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의 선언은 바다를 건너 조선에도 닿았다. “모든 민족은 스스로의 운명을 결정할 권리를 가진다.” 그 말은 1919년 3·1 운동의 정신적 불씨가 되었다. 학생들과 지식인, 종교인들이 그 말을 붙들고 거리로 나섰다. 그러나 국제정치는 이상만으로 움직이지 않았다. 윌슨의 원칙은 패전국의 식민지에만 제한적으로 적용되었고, 일본의 통치를 받던 조선에는 미치지 못했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포기하지 않았다. 이상은 현실의 벽에 부딪혔지만, 그 벽을 바라보는 눈빛은 변했다. 언제든 현실은 냉혹하더라도, 꿈꾸는 마음이 있었음을 우리는 잊지 않았다. 이상은 그렇게 다시 사람의 삶 속으로 스며든다.

 

살다 보면 한 문장으로 남을 수 있는 삶이 부럽다. 조지 버나드 쇼는 “우물쭈물하다가 내 이럴 줄 알았다”고, 헤밍웨이는 “일어나지 못해 미안하오”라고 남겼다. 죽음을 앞두고도 웃음을 잃지 않은 사람들이다.

 

철학자 칸트는 “내 위의 별이 빛나는 하늘과 내 안의 도덕 법칙”을 말하며 평생의 사유를 정리했고, 앙드레 지드는 “신은 나를 버렸다. 그러나 나는 신을 사랑했다”고 남겼다.

 

누군가는 유머로, 누군가는 신념으로, 또 누군가는 사랑으로 자기의 생애를 압축한다. 사람마다 다른 단어를 쓰지만, 결국 모든 묘비명은 하나의 문장으로 향한다. “나는 이렇게 살았다.”  

 

먼저 세상을 떠난 친구의 묘비명이 문득 떠오른다. “너희들(자식들)이 있어 행복했다.” 그 사람의 인생이 그 문장 안에 다 들어 있다. 무엇을 이루었는지 보다, 누구와 함께 살았는지가 그의 자랑이었을 것이다. 남겨진 이들을 향한 마지막 인사이자, 평생의 사랑과 감사였다.

 

그 문장을 떠올리면 자연스레 내 마음이 나 자신에게로 옮겨 온다. 언젠가 내 묘비명은 어떻게 쓰일까. 나는 이렇게 적고 싶다. “나와 함께 살아 준 모든 이들 덕분에 참 행복했습니다.” 이 문장이 좋다. 내가 누군가를 붙들고 산 것이 아니라, 나와 함께 살아 준 사람들 덕분이었다. 가족, 친구, 동료, 이웃, 그리고 스쳐 간 인연들까지. 혼자 견뎠다고 믿었던 시간들 속에도 사실은 누군가의 이해와 묵묵한 배려가 있었다.

 

묘비명은 죽은 뒤에 남는 문장이지만, 어쩌면 살아 있는 동안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미리 알려주는 다짐일지도 모른다. 언젠가 그 한 줄을 남기고 싶다면, 지금 더 자주 고맙다고 말해야 한다. 꿈을 꾸는 날에도, 누군가의 기도가 되어 주는 날에도. 나는 믿는다. 삶의 위대함은 업적이 아니라 마음에 있다. 누군가의 꿈을 응원하고, 한 사람의 불안을 품어 주고, 말없이 곁을 지켜 주는 일. 그 조용한 시간이 바로 삶을 단단하게 만드는 힘이다.

 

그래서 나는 이렇게 마무리하고 싶다. “꿈꾸는 사람 곁에는 언제나 기도하는 사람이 있었다.” 그리고 그 기도의 마음이 또 다른 누군가의 꿈이 되어, 오늘의 세상을 조용히 떠받치고 있을 것이다.

 

 

[문용대]

한국수필 수필문학상 수상

문학고을 소설문학상 수상

지필문학 창립10주년기념 수필부문 대상 수상

코스미안뉴스, 브레이크뉴스 고정 필진

한국예인문학, 지필문학, 대한문학, 각종 문학카페 활동

대한문학 부회장, 지필문학 이사

수필집 ‘날개 작은 새도 높이 날 수 있다’, ‘영원을 향한 선택’

이메일 : myd1800@hanmail.net

 

작성 2026.04.02 10:28 수정 2026.04.02 1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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