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곽흥렬 칼럼] 빛깔 연한 꽃이 향기가 짙다

곽흥렬

누군가로부터 선물을 받는다는 것은 가슴 부푸는 일이다. 특히나 그것이 난 종류일 때는 그 즐거움이 배가倍加된다. 예부터 고결함 혹은 지조의 대명사로 일컬어지는 초화草花가 바로 이 난이 아니던가. 난초처럼 올곧게 살아가자며 암묵적인 동조를 구하는, 보낸 이의 순정한 마음이 전해져 오는 까닭이다.

 

어저께는 내가 출강을 하고 있는 문예창작반의 연만한 제자분이, 스승의 날이랍시고 서양란 한 분盆을 선물해 왔다. 동양란을 압도하고 남을 만큼 꽃 모양이 크고 빛깔도 화려하다. 거실에다 들여놓으니 집 안이 금세 불을 켠 듯 환해지는 느낌이 든다. 인종상으로 따져 보아도 동양인보다 서양인이 덩치가 우람하고 피부색이 허여멀쑥하거늘, 문득 난까지도 그런가 싶은 가당찮은 생각이 들기도 한다.

 

이번만큼은 혹시나 향기가 있으려나. 내심 은근한 기대를 안고 살그머니 코끝을 가져가 본다. 하지만 그 ‘혹시나’가 이내 ‘역시나’로 바뀌고 만다. 하나같이 향기라고는 약에 쓰려 해도 맡을 수 없는 꽃. 보내준 분에게는 퍽 죄스러운 말이지만, 조화造花보다 나을 게 뭐 있느냐는 가벼운 불평이 입 안에서 맴돈다. 

 

동양란에 생각이 미친다. 피어 있는 듯 없는 듯 수줍게 꽃대를 올리는데도 한두 촉만 벙글면 온 방 안이 은은한 향취로 가득 차는 동양란, 샤넬이다 뭐다 하는 등속의 이름깨나 있는 방향제들을 모조리 갖다 댄대도 족탈불급일 천연의 향수가 아닌가. 

 

참 희한하게도, 인공의 냄새는 줄곧 맡고 있으면 머리가 탁해지지만, 자연의 냄새는 맡으면 맡을수록 머리가 맑아진다. 동양란이 바로 그러하다. 오래 함께 있어도 권태롭지 아니한 벗처럼, 동양란의 향기는 아무리 맡아도 싫증이 나지 않는다. 

 

꽃 빛깔이 곱기로야 선인장만 한 것이 있을까. 이글거리는 태양의 나라에서 피어나는 사막의 꽃답게 정열적인 화려함을 뽐내는 것이 선인장의 꽃이다. 거기에는 사람의 마음을 송두리째 빼앗아 놓는 기생집 여인의 요염함 같은 것이 있다. 그 고혹적인 자태에도 불구하고, 그러나 선인장꽃 역시 향기가 없기는 매일반이다. 향기가 없다 보니, 자연 벌 나비들이 날아들지를 않는다. 이를테면 죽음의 꽃이라고나 할까. 

 

어디 꽃뿐이랴. 풀을 봐도 그렇고 버섯을 봐도 마찬가지다. 생명을 위협하는 독초며 독버섯은 화사한 자태를 뽐내면서 포식자들을 유혹하는 데 반해, 고운 향내를 풍기는 허브 식물이나 식용할 수 있는 버섯들은 한결같이 수수한 모습을 하고서 다소곳이 제자리를 지킬 뿐이다. 무릇 세상의 오만 가지 물상들 가운데 겉으로 화려한 것 치고 내면에서 우러나는 우아함 지닌 것이 단 하나라도 존재할까.

 

학부 시절, 절친했던 몇몇 벗 가운데 시골서 유학을 온 아이가 있었다. 다른 면에선 어련무던한 그였지만, 붙여놓고 먹을 밥집 고르는 일 하나에서만큼은 몹시 까탈을 부렸다. 음식의 값이라든가 짜여진 식단이라든가 혹은 조리하는 솜씨 같은 것 때문이 아니었다. 그가 유달리 민감하게 반응을 보인 부분은 엉뚱하게도 주인아주머니의 차림새였었다. 입고 있는 옷이 너무 화려하거나 화장이 지나치게 짙으면 그런 집엔 두 번 다시 출입을 하려 들지 않았다. 울긋불긋 요란스러운 몸치장만 봐도 그만 메스꺼움이 일어 식욕이 싹 달아나 버린다는 것이 그의 변설이었다. 

 

하기야 유유상종이라고, 나 역시도 그런 면에선 지나치다 싶을 만큼 세심한 구석이 있다. 어쩌다 새빨간 매니큐어에 블루 마스카라, 치렁치렁한 귀고리를 한 여인이라도 만나면 무의식중에 경계의 촉수를 곧추세우게 된다. 눈 뜨고도 코 베어 갈 깍쟁이처럼, 어딘지 모르게 꾸미고 감추며 속임수를 쓰려 든다는 인상을 지울 수가 없는 까닭이다. 반면에 수수하게 차려입은 아낙을 대하면 어쩐지 마음이 푸근해져서 절로 무장 해제가 되어 버린다. 빛깔 연한 꽃이 도리어 향기가 짙듯이, 사람 또한 차림새가 수수한 사람이 오히려 아름다운 향내를 품고 있을 것 같아서이다. 

 

속 빈 강정이라는 속담이 공연히 생겨난 말일까. 보기 좋은 것과 풍겨 나오는 향은 정반대인 경우가 항다반사이다. 겉치레에 열을 올리는 사람일수록 십상팔구 마음을 가꾸는 데는 소홀히 하기 때문이리라. 겉포장이 번지르르할수록 그만큼 내면의 값어치는 떨어진다는 것이, 지금껏 살아오면서 내린 나의 대체적인 결론이다. 

 

이치가 이러함에도, 세상 사람들은 작고 소박한 것보다는 기를 쓰며 크고 화려한 것만을 구하려 드니 대체 무슨 까닭인가. 참으로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곽흥렬]

1991년 《수필문학》, 1999년《대구문학》으로 등단

수필집 『우시장의 오후』를 비롯하여 총 12권 펴냄

교원문학상, 중봉 조헌문학상, 성호문학상, 

흑구문학상, 한국동서문학 작품상 등을 수상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창작기금 받음

제4회 코스미안상 대상 수상

김규련수필문학상 수상

유혜자수필문학상수상

이메일 kwak-pogok@hanmail.net

 

작성 2026.03.24 10:50 수정 2026.03.24 11: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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