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계봉의 인문기행] 산신으로 부활한 단종과 금성대군

여계봉 대기자

30여년 전 어느 겨울날, 백두대간을 종주 중이던 필자는 소백산 산줄기를 등반하기 위해 새벽에 죽령을 출발한다. 악명 높은 소백산의 매서운 칼바람을 견디며 연화봉을 지나 정상인 비로봉에 오른 후 국망봉을 거쳐 해 질 무렵에서야 태백산과 소백산 양백지간(兩百之間)의 고갯길 고치령(古峙嶺, 770m)에 도착한다. 태백산과 소백산을 이어주는 고치령은 영주시 단산면 좌석리와 마락리 사이에 있는 고개다. 그러나 좀 더 크게 보면 단양군 영춘면과 영주시 단산면을 연결하는 고개이기도 하다. 죽령을 지나 동북으로 흐르던 백두대간 소백산 줄기가 동쪽으로 방향을 틀어 처음 만나는 큰 고개가 고치령인데, 서쪽으로 형제봉, 국망봉, 비로봉 등 소백산의 준봉들이, 동쪽으로 태백산으로 이어지는 마구령과 선달산의 마루금이 유려하기만 하다. 

 

영화에서 영월의 단종이 순흥의 금성대군을 만나기로 했던 고치령

 

시야를 가리는 옅은 눈발을 헤치니 인적 끊긴 허허한 고갯마루 오른쪽에 작은 전각 하나가 눈길을 끈다. 고치령 산령각(山靈閣)은 옛날 이곳을 지나던 백성들이 무사히 산을 넘을 수 있도록 산신령에게 기도하던 성황당이었는데, 요즘은 백두대간을 종주하는 산꾼들이 안전 산행을 기원하기 위해 꼭 들리는 장소이기도 하다. 양백지간 소백산 자락에 깊숙이 들어앉은 전각의 문을 열자, 백마를 탄 단종에게 과일을 진상하는 모습이 그려진 단종의 영정과 함께 제단 위에는 '태백산신'과 '소백산신' 위패 두 개가 나란히 자리하고 있다. 최근 관객 1,400만명을 목전에 둔 영화 '왕과 사는 남자'의 주인공들인 단종과 그의 숙부 금성대군이 죽어서 백두대간 태백산과 소백산의 산신으로 부활한 것이다.  

 

 단종과 금성대군을 모신 고치령의 산령각 

 

팬데믹 이후 한국 영화 최고의 실적을 기록하며 흥행 질주를 이어가고 있는 이 영화는 1457년 청령포를 배경으로 마을의 부흥을 위해 유배지를 자처한 촌장과 왕위에서 쫓겨나 유배된 어린 선왕의 이야기를 역사적 사실성에 기반하여 만든 작품이다. 어린 나이에 숙부 수양대군에게 왕위를 찬탈당한 뒤 죽임을 당한 조선 왕 단종과, 조카를 끝까지 지키려 했던 숙부 금성대군, 그리고 목숨을 걸고 그의 최후를 수습한 엄흥도의 이야기를 감동적으로 그려내 국내는 물론 국외에서도 큰 호평을 받고 있다.

 

영화 속에서도 나오는 고치령은 소백산 자락의 백성들이 신라시대부터 사용해 온 오래된 고개이다 보니 처음에는 '옛 고개'로 불렸는데, 지명이 한자로 바뀌는 바람에 '고치재(古峙岾)'로 변했다가 지금의 '고치령(古峙嶺)'이 되었다고 전해진다. 금성대군의 '밀사'가 이 고개를 오가고, 영월 유배지에 있던 단종이 순흥 땅에 귀양 가 있던 숙부 금성대군을 만나기로 했던 고갯길, 그 비운의 통로가 바로 이곳 고치령이다. 소백산 자락 순흥면에서 좌서기리를 지나 고치령에 올라서 반대 방향으로 내려가면 마락리가 나오고, 단양 영춘면을 지나 조금만 가면 강원도 영월 땅이다. 소백산맥을 넘는 고갯길 세 곳 중에서 '가운데 길'에 속하는 고치령은 당시에 경상도 영주와 강원도 영월을 가장 빠르게 잇는 지름길이기도 했다. 당시 단종과 금성대군 사이는 불과 50㎞, 하루면 넉넉히 갈 거리였지만 그 둘은 끝내 만날 수 없었다. 

 

계유정란(癸酉靖亂)으로 수양대군이 정권을 찬탈한 후 모반 혐의로 경상도 순흥도호부에 귀양가 있던 금성대군은 1457년 6월 단종이 노산군으로 강봉되어 영월 청령포로 유배된 사실을 알게 된다. 단종을 복위시키는 거사를 계획하고 있던 금성대군은 밀사를 보내 고치령을 넘어 영월로 단종을 찾아가 자신들의 뜻을 알리도록 하는데, 이들이 이 고개를 넘을 때마다 대의를 위해 결의를 다졌다고 해서 '의거를 세운 고개'라는 뜻에서 건의령(建義嶺)으로도 불렸다고도 한다. 

 

금성대군은 순흥부사 이보흠과 거사를 도모했지만 거사 전에 시녀 김련과 관노의 밀고로 계획이 들통나면서 결국 사사(賜死)되고, 단종의 장인 송현수도 죽음을 맞게 된다. 복위의 불씨가 꺼지면서 단종 역시 끝내 처형되면서 단종 복위 운동도 허무하게 그 막을 내리게 된다. 하지만 정축지변(丁丑之變)으로 불리는 사건의 후폭풍은 엄청나게 참혹했다. 안동부사가 군사를 이끌고 와 순흥도호부에 불을 지르고 백성들을 죽였으며, 한양에서 중기병과 철기병이 출동해 2차 학살이 벌어진다. "근방 30리 안에 살아 있는 사람이 없었다"고 할 정도로 승자의 잔인한 보복이 순흥 땅에 벌어진 것이다.

 

영주 안정면 동촌리 '피끝마을'은 단종 복위 운동의 비극과 맞닿아 있다. "피가 냇물을 따라 흐르다가 멈춰서 끝난 곳"이라는 마을 이름의 유래는 잔혹할 만큼 직설적이다. 영화에는 등장하지 않지만 역모의 땅으로 낙인찍힌 순흥도호부가 폐부되고 단종 복위 운동에 함께했던 순흥 백성들의 수난이 시작된다. 수백명의 백성들이 죽계천의 청다리로 끌려가 목숨을 잃으면서 이들의 피가 죽계천을 따라 10리를 흘렀고, 핏물이 멈춘 안정면의 마을은 이때부터 마을 이름도 '피끝마을'이 된다. 당시에 살아남은 아이들을 관군들이 데려다 키웠다고 해서 우리가 흔히 쓰는 '다리 밑에서 데려왔다'는 말의 유래가 되었다고 한다.

 

고치령에서 마구령을 지나 대간 길을 따라 태백산에 올라서면 천제단 아래에 단종비각(端宗碑閣)이 있다. 비에는 '조선국태백산단종대왕비(朝鮮國太白山端宗大王碑)'라는 글귀가 새겨져 있다. 단종은 죽어서 태백산 산신, 조카인 단종을 복위시키려고 쿠데타를 모의하다 죽은 금성대군은 소백산 산신이 되었다. 백두대간 소백산 고치령과 태백산 정상에 모셔진 단종과 금성대군. 억울하게 죽은 왕과 그의 숙부를 그냥 보낼 수 없었던 민초들의 간절한 염원으로 이들은 산신이 되어 부활한 것이다.

 

태백산 산신으로 부활한 단종의 비각

 

필자가 '왕과 사는 남자'를 보고 느낀 점은 이 영화가 펜데믹 이후 전 세계인이 경험한 외로움과 조선의 유배 문화가 가진 고립감이 맞닿아 있다는 것이다. 우리가 몇 년 전 온몸으로 겪은 사회와 격리되고 단절되어 혼자 남겨진 외로움의 느낌이 500년 전 강원도 영월에 홀로 유배된 한 소년의 이야기와 겹쳐져 시대와 공간을 뛰어넘은 공감을 불러일으킨 것이 아닌가 한다. 또한 냉혹한 권력 앞에서 굴복하지 않고 사람의 도리를 다하는 등장인물들의 용기 있는 행동은 권력의 틀 밖에 있는 사람들에게 깊은 감동을 불러일으킨다. 이 영화가 엄청난 반응을 일으키고 있는 이유는 과거의 시대상을 다룬 그저 그런 사극물이 아니라 수백 년이 지난 이 시대에도 본질은 같지만 해결되지 못하는 문제점들이 여전히 존재한다는 사실에 관객들이 크게 공감하기 때문이다.

 

 

 

[여계봉 대기자]

수필가

공학박사

이메일 : yeogb@naver.com

작성 2026.03.21 14:16 수정 2026.03.21 14: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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