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은숙 칼럼] 오늘도 사랑 통역 중

민은숙

낯선 타국에서 절실히 도움이 필요한 외국어를 마주할 땐, 우리는 단어 하나, 몸짓 하나도 놓치지 않으려고 온 신경을 곤두세운다. 그러나 모르는 단어가 하나도 없는 한국어로 말할 때는 그런 집중이 잘 발휘되지 않는다. 이미 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드라마 〈이 사랑 통역 되나요?〉의 주인공 호진은 언어를 넘나드는 능숙한 다중언어통역사이나 정작 가장 가까운 이의 마음 앞에서는 자주 길을 잃는다. 그 모습은 우리의 초상이기도 하다. 감정의 높낮이와 인생의 계절에 따라 모국어는 세상에서 가장 해독하기 어려운 오역의 무대가 되곤 한다.  

 

사춘기를 맞은 아이가 문을 쾅 닫으며 “상관하지 마!”라고 외칠 때, 그 말은 문자 그대로의 거절처럼 들려도 내면을 들여다보면, “나도 내 마음을 모르겠어. 제발 포기하지 말고 기다려줘.”라는 절박한 신호일지도 모른다. 이럴 때 필요한 것은 사전적 정의가 아니라 닫힌 문 너머의 떨림을 기다려주는 침묵의 통역이다.  

 

사람마다 감정의 진폭이 다르다. 그래서 누군가의 언어는 사실의 기록이지만, 또 다른 누군가에겐 존재의 확인이다. 무딘 이의 “알았어.”는 신뢰의 표현이고 예민한 이에게는 권태의 징조처럼 들려오기도 한다. “어디야?”라는 과한 물음은 누군가에게 그리움을 유발하는 방언이지만 어떤 이에게는 구속의 언어로 파고들기도 한다. 이 시차 속에서의 대화는 때로 주파수를 잃은 라디오처럼 잡음을 낸다. 통역의 시작은 상대의 톤이 아니라 우리의 주파수가 어긋나 있음을 인정하는 데서 비롯될지 모른다.  

 

생의 전환기인 갱년기라는 낯선 방언은 때로 자신을 찌르는 가시가 되기도 한다. “다 필요 없다.”는 서글픈 외침에는 “내 쓸모를 다시 찾아주겠어?”라는 숨은 번역이 들어 있다. 평생 가족의 말을 통역하느라 자기 언어를 잃어버린 이들에겐 화려한 미사여구보다 “고생했어.”라는 한마디의 정확한 직역이 더 큰 위로가 된다.  

 

사랑은 오역을 반복하며 계속 시도하는 태도이다. 우리는 모국어 사용자이면서도 사랑 앞에선 서툰 외국인이 될 때가 있다. 마음이 어긋난 날엔 다정한 말조차 날카로운 공격으로 오역될 때가 있다. 이때 사랑의 언어가 되어야 할 한국어가 그 어떤 외국어보다 낯설게 느껴진다.  

 

“사랑은 오로지 ‘하는’ 것이다. 그리고 나는 더 깊이 사랑할 것이다.”  

 

사랑을 이해하려는 모든 시도는 머릿속이 아니라 서툴러도 진심 어린 몸짓과 문장을 계속 시도해 보는 일에서 출발한다. 드라마 속 차무희의 눈빛이 보여주듯, 통역의 본질은 완벽한 문장이 아님에도 곁에 머물겠다는 의지에 있다. 진정한 통역은 마음으로 상대의 그리움을 들여다보는 일이다.  

 

오역은 죄가 아니다. 더 잘 전하고 싶은 간절함이 낳은 실수일 뿐이다. 이른 아침에 도착한 “미안했어.”라는 문자 한 줄은 오역된 마음을 바로잡기 위해 밤새 사랑을 앓은 흔적이자 가장 인간적인 재번역이다. 그러니 오늘 누군가의 날카로운 말 한마디를 공격이 아닌 서툰 번역으로 읽어보자. 그 순간, 우리 삶의 관계에도 김선호 배우의 목소리처럼 달콤한 슈크림 오로라가 내려앉을지 모른다. 사랑이란 기꺼이 오역을 거치고 다시 교정하며 서로의 마음 세계로 걸어 들어가는 일일 테니까.

 

 

[민은숙]

시인, 칼럼니스트

제4회 코스미안상

제3회 문학뉴스 &시산맥 기후환경문학상

2024 중부광역신문신춘문예

청주시 1인 1책 펴내기 지도 강사

꿈다락학교 시 창작 강사

문화재단 & 예술재단 창작지원금 수혜

이메일 : sylvie70@naver.com

 

작성 2026.01.28 09:38 수정 2026.01.28 09: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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